그가 능력은 있으나, 의지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적이다.
그가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 에피크로스
1. 주거 신분사회
1966년 착공한 제 3한강교(한남대교)를 69년 준공, 이는 68년 2월에 착공한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강남개발을 촉진함.
2005년 기준 우리나라 주택 자가 점유율(자기 소유 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의 비율을 나타내는 지표)-전국 55.6% 서울 44.5% 강남 3구는 41.4%로 낮음 비강남사람들보다 강남사람이 주거불안 많이 느낌. 전국적 주택보급률 105.9%에 비해 낮은 자가 소유비율은 문제...
1976년 경기고 삼성동 이전 78년 휘문고 80년 숙명여고 서울고 강남으로 옮김 정신여고 경기여고 등이 잇따라 강남으로..8학군탄생
주택보급률은 2000년대 들어 100%를 넘어섬. 산술적으로는 1가구 1주택이지만 실제로는 아님. 주택보급률 산정할때 300만가구에 달하는 1인가구 포함안됨.
집은 재화로서의 속성과 삶의 거처로서의 속성이 충돌함.
현재 우리나라 공공임대주택 비중은 총주택의 2.5% 삶의 거처에 대한 공적 배려 수준이 미미 유럽 미국은 2~30%
공공임대주택은 영구임대주택과 국민임대주택으로 나뉨. 영구임대주택은 최초의 공공임대주택 89~93년에 19만호 공급.
국민임대주택은 2002년 입주 시작. 영구임대주택 입주자보다 소득수준 높은 서민대상 분양 50대 50으로 임대주택과 분양주택을 혼합하는 국민임대주택.
임대주택은 분양주택에 비해 저렴한 자재 씀 분양가 자율화 이전엔 원가연동제로 이 차이가 적었으나 이런 제한이없어지면서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 품질 차이가 크게 나버린 것.
임대주택과 분양주택을 섞는 사회적 혼합은 세밀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도 서로 배제가 일어난다. 제도적으로 봐도 임대아파트는 임대주택법, 분양아파트는 주택법관리를 받기 때문에 혼선이 예상된다.
공급물량에 치우친 임대주택 정책의 한계: 생활관리 서비스 면에서 부족함. 독서실 운동시설 부족.
집합적 효능감: 전체 사회체계의 수행 능력에 관한 집단 구성원의 믿음 공공임대주택에는 단지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수없다는 지각이 생겨 그들의 집합적 효능감과 주거만족도를 낮춤.
임차인 대표회의: 강제성 없음, 의결권 없음(협의기관), 활동비 없음 -임대주택
입주자 대표회의: 강제성 있음, 의결권 있음, 활동비 있음.-분양주택
임대주택은 빨리 벗어나야 할 곳. 국민임대주택의 장기적 슬럼화 우려
건물의 집합체인 단지는 죽은 공간. 임대주택단지를 삶이 숨쉬는 산 공간으로 가꾸기 위해선 주거복지 관점에서 입주민 자치능력 확장해야 함
'천당 위에 분당'
주택재개발은 일반적으로 개발규모 작은 점적 개발. 그에 비해 뉴타운 사업은 개발 면적이 주택 재개발보다 10배 이상 큰 대단위 재개발.
1989년 개발한 분당 일산 평촌 중동 등이 1기 신도시
2000년대 후반에 개발하기 시작한 판교 김포 등이 2기 신도시
2. 스무살, 인문학을 만나다
템페스타는 다양한 해석을 가진 미스테리한 작품. 조르조네의 그림. 남자인물을 새로그리고 목욕하는 여인을 지워버림.
알타이: 황금이란 뜻.
미술사학은 셜록홈즈의 범죄수사학과 유사
시헌력: 서양천문학에 기반을 둠. 김육은 시헌력 수용 주장
정조는 학자적 이미지지만 사실은 음모꾼 같은 모습도 있다 1804년 왕이 물려주고 상왕이 되겠다는 갑자년 구상 발표
제자해처럼 ㄱ ㄴ을 만들려면 좌안이 전제되어야 함. 만일 오른쪽 얼굴이었다면 모양은 반대로. 오른손잡이는 좌안, 왼손잡이는 우안에 익숙.
역사속 인간이란 어떤 유적 본질을 갖는 존재라기보다 그 자체가 언제나 사회적 관계의 총체.
생도멩그라는 식민지에서 흑인노예반란으로 노예제 폐지 프, 영, 에스파나 군대. 최종적으로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쳐 새 나라인 아이티 세움.
아우슈비츠를 그렇게 통탄해하면서 대서양 노예제에 대해선 침묵. 그들에게 진정 문제된 것은 야만행위 자체가 아니라 문명들로 문명화된 유럽인이 다른 문명화된 유럽인을 대량학살할수있는가하는 점
계몽사상은 민주주의와 인간주의 기반이 아니라 인종주의의 위계적 사고 바탕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함.
읽은 책: 미래를 여는 한국인 사 정치사회편
1. 미래를 여는 한국인
소련군은 급한 나머지 전쟁 선포도 안 하고 바로 내려와 관동군 궤멸하고 남부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내려옴. 소련군의 사할린점령은 일본의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 일본은 바로 미국에 항복해버림. 서둘러서 미국의 단독 점령 받아들임. 그러나 미국은 일반명령 1호를 공포해 소련을 더 이상 못 내려오게 38선 이북에 가둬버림 왜 소련은 그냥 받아들였나? 그 이유로는 한반도가 소련의 주 관심대상이 아니었다는 점. 주 관심사는 만주지역에서의 이권 소련은 자국군이 만주 점령하자 바로 중국 국민당 정부 설득해 과거 러시아가 누린 권리를 보장받는 협정 체결. 그 댓가로 공산당과 대결중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을 합법정부로 인정해버림. 소련군의 한반도 북부 진주는 만주에 대한 완충지대정도.
필자의 주장: 좌익, 임정세력 친일파라는 세 구도 속에서 좌익과 임정세력이 친일파 제거 위해 우선 손을 잡았어야 함. 좌익, 우익은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
미군정은 남한 내에 전략적 동맹세력을 필요로 했는데 임정이 말을 안 듣자 저 세 구도 중에서 친일파를 택함 만약 좌우익이 손잡고 친일파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면 미국에겐 국내 동맹 세력이 없어지게 되어 한반도 전체가 미국 영향력에서 벗어날 환경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남북모두 미국에 비협조적인 세력이 득세하게 되는 상황이 오면 미국은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결국 민족공존 통일방안 수용뒤 사후대책을 마련하는 게 최선이었다.
이영훈: 분단 책임은 소련과 북한에 있으며 미군정과 협력자들은 그 뒤를 쫓아갔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스탈린이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는 논문. 그러나 이 지시는 북한 주둔 소련군에 내린 것으로 이 지령 앞에는 소비에트 수립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온다. 즉, 북한지역에서 온건하게 부르주아와 연합하라는 뜻이었음. 스탈린은 북한 지역에서 미국과 정면대결을 원치 않았음 위에 나오듯 동북아에서 이권 보장받으려면 중국 국민당 정부나 미국과 충돌해선 좋을 게 없기 때문.
실제로는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수립됐다. 이는 해방직후 전국적으로생긴인민위원회가 북에서는 없어지지않고 발전한 결과. '임시'라는 말을 붙인 건 아직 통일정부가 생기기 전이기 때문에. 북한 단독정부가 아님을 강조한 것 소련군은 인민위원회 해체하고 군정했던 미국과 달리 군정 실시 안하고 인민위원회 일하도록 방조함. 그리고 이 인민위원회는 친일파청산과 토지개혁을 시행함. 결국 북한이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증거로 제시된 것들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자연스러운 과정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은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조짐을 보이자 남한단독정으로 방향을 잡음. 이승만의 정읍발언도 계산되어 나온 것.
48년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후 조선 문제를 조선인에게 맡기자고 제안함. 물론 둘 다 철수하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좌익이 정국을 주도하리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한반도문제를 유엔에 맡겨버림. 유엔은 1947년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실시하고 통일정부 구성하기로 함. 그런데 이 임시위원단에는 미국에 우호적인 나라만 잔뜩있었음. 소련에 속하는 우크라이나 하나 들어있다가 친미적이라는 이유로 탈퇴해버림. 소련과 북한도 역시 유엔결정에 반대의사 밝혔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며 방문 거부. 그러자 임시위원단 내부에서 의견차이 발생. 중화민국 필리핀 엘살바도르는 가능한데서만 선거하자, 호주 캐나다 시리아 인도는 그렇게 하면 영구분단 온다고 반대.
의견 합의를 결국 못 보고 유엔 자문기관인 소총회에 문의. 그런데 여기서 남한단독선거안을 31:2로 가결해버림 2표는 호주와 캐나다인데 총회 결정사항인 남북 총선거를 자문기관인 소총회가 뒤집을 수 없다는 이유. 결국 임시위원단 8개국중 4개국은 소총회 결의를 받아들임. 특히 이 중에서 임시위원단 단장이던 인도대표 메논이 찬성한 건 자국 정부의 중립방침 위반한 것. 이는 모윤숙과의 우정과 관련 있음.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첫 5.10 단독선거에서 부정을 발견했지만 미국 압력으로 선거 승인해줌.
임기 2년 국회에서 4년 대통령 선출하는 것을 골자로 제헌헌법 제정됨
노덕술을 위시한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 간부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서는 이들이 월북해서 사살했다고 조작해 죽일 속셈이었음. 국회 프락치 사건: 49년 5월, 소장파 의원 15명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됨.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 주장하고 반민특위 앞장서던 이들을 남로당의 국회 프락치 공작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구속시킴. 검찰에 따르면 개성에서 남로당 특수공작원 정재한이라는 여인 검거했는데 이 여인이 박헌영에게보내는 국회공작보고서 소지하고 있었다. 이게 유일한 증거였는데 정작 정여인은 존재하지 않음.
반민특위가 경찰에게 공격받았을때 대중적 저항이없었던 게 문제. 소장파의원과 특위요원만의 외로운 투쟁. 임정세력 지리멸렬했고 좌익은 계급투쟁에 매몰돼 무관심.
빨치산 투쟁은 49년 절정 후 세가 급격히 위축됨 그 이유는,
첫째 지리산이 너무 좁았다. 항일투쟁의 근거지이던 백두산 넓이가 8천평방킬로미터이상인데 반해 지리산은 해봐야 384평방 킬로미터. 한국전쟁 중 김일성도 이 사실을 인식하고 산에서 내려와 정치사업에 매진할 것을 지시함.
둘째 후방지원해야 할 남로당조직이 파괴됨. 반민특위 공격하면서 좌익 무차별 공격 시작. 남로당 서울시당은 핵심대열이 한꺼번에 투항하기도 함.
분단은 통일정부 추진세력이 단독정부 추진세력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것, 결국 좌익과 임정은 각개격파-->새로운 시각인듯
셋째 49년 9월 대공세에서 평야지대로 진출했다. 당시 인민군 올거라면서 전면공세했지만 인민군 진격 안했고 대공세는 자살행위가 됨.
1950년의 5.30 선거: 민중은 희망 걸었으나 남로당 중앙은 망국적 선거를 파탄시키라고 지령 내림. 그러나 조직이 다 파괴돼 어떤 일도 못하고 결국 민중과 이반되는 결과만 낳음. 5.30선거는 5.10 선거와 달리 다수 진보적 인사가 무소속으로 출마. 또한 단정수립추진세력이 갈등없이 임했던 5.10선거와 달리 민국당과 이승만의 갈등 심함 이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하는 세력은 다 모아도 57석, 국회에서 대통령 선출하는 걸로 볼 때 이승만에겐 큰 위기--> 전쟁과 사회
수정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남침유도설: 한국군이 해주 진격 사실을 근거로 함. 하지만 이는 근거없음. 북한부터가 이를 날조로 일축했으며 해주 방면 담당하던 인민군 지휘관을 승격시키기까지 함.
한국전쟁시 미국의 목표: 한반도 지키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 진영을 제압하고자 하는 것이었음 소련과 중국을 분리대응. 구체적으로는 패전국 일본을 아시아 후방병참기지로 전환시키고 한반도 대만 베트남을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중국대륙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전략. 결국 알면서도 기다린 셈. 설령 북한이 공격 안했어도 통킹만 사건때처럼 어떻게든 무력침공했을 것. 이승만도 6차례 북진통일론 피력했는데 이 역시 단순한 제스처로 보기 어렵다
미군사고문단장 브라운은 비상경계령을 6.24일 0시를 기해 해제하도록 하고 파티를 열었다. 각급부대의 장병들도 모처럼 주말 즐기러 휴가를 나왔고 서울시내극장가는 장병들로 넘쳐남.
김일성은 내려올 때 민중봉기 기대했지만 이승만이 농지개혁으로 혁명성 다 제거해버림. 군사작전 역시 예상치 못하게 주일미군이 비행기 보내면서 방공장비도 없는 인민군을 폭격.
유엔군 참전했지만 사실상 미군이나 다름없음. 그럼 왜 유엔군으로 참전했는가? 한국전쟁이 내전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 내전은 당사자 해결을 우선적 원칙으로 삼기 때문. 미군의 개입은 제 3자개입으로서 부당하기 때문에... 정작 38선의 원상회복이라는 유엔결의 무시하고 미군은 북으로 진격해들어감. 자신의 한국전쟁참전을 유엔결의에서 찾았던 태도에 비하면 이는 이율배반적.
이승만 52년 부산에 계엄령선포하고 발췌개헌안 강압통과. 표결은 기립투표.
한국전쟁은 단순히 국가와 국가간 전쟁이 아니라 진영간의 전쟁. 이는 두 진영 간 군사작전 차이에서도 확인됨. 사회주의 진영은 인민지원과 협력을 바탕으로하는 인민전쟁론을 견지함. 이는 중국군 참전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남. 반면 자본주의 진영은 물량공세 위주로 전쟁 수행. 융단폭격이나 몰살작전이 그들의 특기.
1950년 7월 미군은 노근리 근처 임계리 주곡리 주민 500명을 안전한데로 피난시켜주겠다고 속여 노근리로 끌고감. 그들을 철로위에 세워놓고 소지품검사한뒤 어디론가 연락 취함. 곧바로 미공군기 나타나 20분간 폭격. 철로는 휘고 피바다. 살아남은 400여명의 피난민을 쌍굴다리 밑으로 몰아놓고 3일동안총탄세례 이렇게 미군공격에 의한 집단희생 발생한 곳은 2000년 말까지 확인된 곳만해도
60여 곳이 넘는다. 평택 근처까지 내려온 북한군과 중국군에 대해 재반격하는 과정에서 그 근처 부락들이 몰살됨
다수 북한 지역거주자들의 월남은 미국의 원폭 투하 위협도 원인중하나임.
이승만 정권은 손 쓸 수없던 한강이북 서대문형무소 빼고 갇혀있던 좌익세력을 남하하면서 다 죽여버림. 그 최대규모가 대전형무소. 여순사건이나 4.3항쟁 관련자들이 대부분. 진짜 핵심들은 이미 처형됐기 때문에 남은 사람은 단순가담자 정도. 그런 형무소 학살이 전주 진주 원주 청주 대구 형무소에서 이뤄짐. 이와 마찬가지로 보도연맹원도 다 죽여버림
이렇게 학살된 민간인숫자가 다해서 50만에서 많게는 100만명.
연좌제로 이문열도 고통받음. 가정교사 하는데 막 경찰와서 묻고 그러면 집에서 싫어함..
인민군의 모시기공작: 김규식, 조소앙 등이 납북됨. 인민군에의해 석방된 국회 프락치 관련 국회의원 14명도 같이 올라감. 자발적인것도 있고 강제적인것도있었음
지주가 자본가로 전환되지 못함. 한국전쟁 거치면서 그대로 몰락<--남미와 우리가 다른 원인
지주가 몰락함에 따라 봉건적 유습도 붕괴돼 자본주의 들어오기 좋은 환경이 되버림
지가증권이 융자 담보로 인정 안 되고 귀속업체 불하받으려면 400석 이상 보상받아야 하는데 그런 지주가 드물었음.
북한은 인민들의 폭격경험과 함께 반미를 몸으로 느끼며 강화해감.(ex 신천대학살) 반면 남한민중은 한국전쟁 이전 북에대해 우호적이었다가 그들의 남침때문에 그들을 적대시함. 52년 12월 한 설문조사에서 노동자 18퍼센트, 학생 교사 21퍼센트만이 휴전 찬성 나머지는 북진통일 지지.
미국이 장면정권에게 반공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을 강하게 요구하자 곳곳에서 항의집회 개최되었고 항의집회에서는 양키 고홈이 외쳐지기도 함.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 차지철 모두 쿠데타 가담한 군인 출신. 주한미군 사령부와 미대사관은 처음에는 쿠데타 반대하다가 나중에 찬성. 처음 제스처는 그냥 페이크. 자기들이 관계없는 척한 것.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 1등 졸업하고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함. 일본육사 졸업 성적은 3등. 이후 만주군 소대장으로 부임해 항일부대 토벌하는 업무 수행(대상은 주로 중국인, 부분적으로 조선인) 120여회정도 참여함.
김종필은 박상희의 사위.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의 사형원인은 조총련 자금을 받아 민족일보 운영했다는 것. 실제로 조사해보니 민단계열에서 조달한 자금.
이처럼 박정희가 혁신계 세력 먼저 잡은 데는 자기 쿠데타가 적색으로 오해될까봐. 확실히 증명해 보이려고.
이밖에 군사정부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 해주고 구정치인 사법처리 깡패들 조리돌리기 등 민심을 좀 얻었음.
조용수는 죽는게 억울해서 목 매달고도 18분이 걸렸다고 함. 죽은줄알고 줄풀었으나 숨이 안 끊어져서 다시 매달았다고 함
이런 군사쿠데타에 시민들 저항하지 않은 이유는? 저항의 주축이 될 혁신계인사를 신속검거한 탓도 있지만 군부 총칼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또한 쿠데타 세력에 대한 환상도 있었다. 그들의 구악일소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짐 실제로 민족일보마저 군사혁명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설을 실은 바 있음. 이 기대감은 1963년 박정희 출마할 때도 계속 이어짐.
박정희는 윤보선을 귀족 아들로 자신을 빈농의 자식으로 표현함. 그는 "바로 여기 앞에 있는 구두닦이 소년이 나중에 대통령 되는 그런 세상이 와야 합니다. 이젠 서민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귀족이 대통령이 되는 시대를 끝내야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함. 또한 5.16이 동학과 비슷하다며 연좌제폐지하고 우파 혁신세력 석방하겠다고 공언함.
4대 경제의혹 사건: 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 모두 공화당 정치자금 조달용. 증권 파동은 중앙정보부 개입한 주가조작 사건. 워커힐 사건은 워커힐 등 위락시설 건립하면서 자금 일부 횡령해 비자금조성한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은 공식적 수입이 금지돼 있던 일본 차를 수입해 차익남기고 파는 수법으로 비자금 마련. 빠찡꼬 사건은 수입 금지된 도박기구인 빠찡꼬 수입과 영업 허가해준 댓가로 비자금 조성한 사건
박정희가 물러나는 관료 장성들에게 준 돈은 그런 비자금들에서 나옴.
전두환: 1963년 중정 인사과장. 중정 간부는 대부분 현역군인
반공법은 박정희 정부때 4차례개정되며 버팀목역할하다가 1980년 12월 31일 그 내용이 국가보안법에 흡수되면서 폐지됨.
1968년 파출소에서 어떤 사람이 공화당이 공산당보다 못하다고 했다가 2년형 받았고 1970년에 철거반원에게 김일성보다 못한 놈들이라고 했다가 구속되고 70년대 후반에는 KBS 한 엔지니어가 술취해 집에가다 객기로 한말을 택시기사가 신고해 반공법조사받고 직장에서 쫓겨남 1964년 연재물에 걸인에 대해 취재한 경향신문 기자가 반공법 구속. 동아방송 프로그램 <앵무새>가 부패사건 비판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구속. 리영희가 사상계에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안건을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에서 검토중이라고 썼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북한은 68년 김신조 파견했는데 중간에 내려가다 나무꾼 만났는데 살려줌. 결국 그 나무꾼이 수상하게 생각해 당국에 신고. 같은 해 10월 30일 울진 삼척지역에 공비 내려보낼때는 만나는 민간인을 모두 죽임. 이승복 신화가 이때 생김. 다수 민간인이 학살되며 극렬한 반공의식 다시한번고취됨. 1.21 사태계기로 학도호국단이 학생회를 대체하고 고교생과 대학생상대로 교련교육 실시되고 1971년 민방위 훈련시작되고 1976년에는 전국적으로 1달에 1번씩 반상회를 열게 함. 이는 일제때의 국민반을 본뜬 것으로 정부의 시달사항을 전달하는 통로.
병영국가다 보니 군대에서 하급병사가 장교나 상관보면 주눅드는 현상이 국민들에게도 일어남. 괜히 군경이나 관청사람만 보면 움츠러들고 열차에 탔을 때 차장 무서워하고 그랬음.(당시는 차장이 철도청공무원이었지만 지금은 코레일 직원이라 친절함)
정부당국은 기지촌 여성들을 1달에 1번 강당에 모아놓고 "당신들은 애국자다 우릴 지키는 미군위안해주고 달러를 벌어들이는.."따위의 말을 함. 비슷한 맥락에서 1973년 문교부장관 민관식은 일본윤락업소에 많은 여성이진출한 것을 가리켜 일본에있는 수많은 한국기생과 나이트클럽 호스테스들은 칭찬할만한 애국심의 소유자이며....라고 햇다. 이런 게 박정희 시대의 여성관
광주 대단지 사건: 1968년부터 광주에 35만평 규모대단지 만들어 청계천 빈민 20여만명 강제 이주. 이게 성남시의 출발 그러나 식수 도로 배수시설 전혀없고 생계방편또한 마련안돼있는 난민촌같은 곳. 민둥산에서는 먼지가 날리고 화장실없어서 분뇨로 악취진동. 게다가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일자리가 없거나 있어도 서울에있음. 이런 상황 청원해도 개선안되자 이주민들이 대거 서울로 올라감 이게 바로 71년 8월 10일에 벌어진 광주대단지폭동.
무등산타잔사건: 77년 4월 광주 무등산중턱에서 철거반원이 무허가 건물에 불지름. 박흥숙이라는 청년이 자기 집 불타고 어머니 쓰러지는 거 보고 흥분. 돈 30만원이 잿더미가 되버린 탓. 철거반원들이 다른 집 부술때 쇠파이프로만든 딱총으로 철거반원 위협하면서 묶어버림. 그들이 사과 안하고 격렬히 반발하자 격분해 쇠망치 휘두름. 결국 4명사망 1명 중상. 박흥숙 구명운동이 전개됐지만
재판부는 사형언도 결국 1980년 사형집행됨.
이효상 국회의장이 71년선거때 박정희 신라후예 드립.
<모래시계>에서 최민수나 박상원이나 똑같이 광주 고향인데 검사로 성공한 박상원은 표준말, 조폭인 최민수는 전라도 사투리 그대로 쓰는 차별적 양상 보여줌
69년 3선개헌안 통과시킬때 야당의원이 점거하는 본회의장 버리고 국회 제 3별관 특별위원회실에서 개헌안 날치기 통과. 의사봉 준비 안돼서 주전자뚜껑이용.
1971년 시국사건 무죄판결 많이 내린 서울지법 판사에 대해 구속영장 신청하자 이에 항의해 전국 판사 106명이 사표제출하는 사법파동 일어남. 얼마후인 10월에는 고대 학생들이 박정희 부정부패 규탄하면서 부패인물 핵심으로 수도경비사령관 윤광웅 지목. 윤광웅은 열받아서 헌병대 병력 30여명 끌고 고대 난입. 이처럼 군인들이 그대로 대학가 난입하는 일이 잦았음. <---60년대만 해도 박정희 정권은 독재가 아닌 부정부패로 규탄받았음을 알 수 있음
유신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 3분의 1과 법관임명 가능 국회의원 임기 6년에 중선거구제로 바꿈. 지역구에서 여당의원 당선될 것이 분명했음을 감안하면 자동적으로 여당이 3분의 2 의석차지하게 보장한 셈.
1973년 육영수 저격사건때 사건당일 자정 때 경호실이 행사장에서 탄두 수거해감. 육영수여사가 다른 사람 쏜 총에 맞은 거 아닌가하는 의혹이 있음.
74년 봄 민청학련 사건 터짐. 민청학련은 그냥 유인물 돌리기 위한 이름이었는데 그걸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대거 연행 게다가 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 지목. 8명 사형. 고문흔적이 심했던 시체는 화장시킴. 그 시신인도받은 가족 증언에 따르면 발뒤꿈치 손발톱이 까맣게 타 있었다--> 전기고문의 흔적
긴급조치는 9호까지 내려짐.
수업 안 들어가면 사형...어디있던거더라?
1978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알몸시위하는데 분뇨공격
1979년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 미국은 글라이스턴 대사를 소환할만큼 파장 컸다.
박정희는 74년부터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 핵무기 준비. 미국은 국무부관리까지 파견해가며 견제했지만 박정희는 장소를 서울에서 대덕으로 옮겨가며 핵개발 추진. 박정희 죽음이 미국과 관련없다 하더라도 미국은 그의 제거나 하야를 희망했음. 이를 잘 아는 김재규가 일을 저질렀을수도있음.
당시 군부는 특권적 지위 "학사 위에 석사 석사 위에 박사 박사 위에 육사"
하나회는 60년대 중반 결성됨. 63년 박정희가 민정이양한다 했을 때 전두환 노태우등 육사 11기 5인이 찾아가 군 복귀 결정 반대함. 박정희는 흐뭇해하며 이들을 적극지원할 것을 지시. 그 이후 전두환은 경호실차장과 보안사령관등에 임명됨.
전두환의 보안사와 정승화의 계엄사의 대결에서 보안사가 승리함. 육참 정승화는 납치되었다가 망명했고 계엄사 측의 정병주 장태완 등은 제거됨<--5공화국 장포스 영상
전두환은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과 월남전 참전 계기로 친분이 있어 그 영향력으로 정승화 직속부하들의 역쿠데타를 막을 수 있었다. 80년4월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됨. (당시 보안사령관인데 중앙정보부법이 겸직을 금하고 있어 서리가 붙음)
5.15일 가두시위 대열확대되면서 시민 참여 경찰도 막다가 안 되는 거 알고 이동을 호위하기도 함. 5.15일 모여든 40만명 가량의 학생과 시민들은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 부근에 군인실은 트럭과 장갑차가 집결해있다는 제보를 받음. 당시 그 부대는 시위진압 전문 20사단( 충정부대) 그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서울역사수를 외쳤지만 심재철(현한나라당 국회의원)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의 지도부는 시위중단을 결정함. 표면상으로는 수가 적은 심야에 군부대와 충돌하는게 바람직하지 않다가 이유였지만 군부대 투입되면 자기들이 대표로 잡힐걸 우려한 결과. 결국 4.19때처럼 군부 총칼앞에 목숨걸고 싸우지 못한 한계를 고스란히 재현함
17일 신군부는 학생들이 겁먹은 거 알고 대공세.
5.18- 전남대 학생들이 구호 외침과 동시에 공수부대가 막 진압하면서 시작됨. 금남로 가톨릭센터에선 9층옥상에 공수대원 6명이 시위상황을 무전으로 알리는 걸 알고 200여명의 청년들이 밀고 올라가 공수부대원 무장해제함. 바로 그때 장갑차가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는가운데 공수부대원들 센터안으로 난입. 못나온 청년들이 처참하게 죽어감. 21일이 되자 아시아자동차 노동자 협조로 장갑차와 차량도 확보함. 그때 구호가 '전두환 찢어죽이자' '두환아 내 자식 내놓아라' 그 장갑차로 21일 오후 1시에 공수부대쪽으로 도청앞까지 쫙 밀고감. 그러다 오후 1시 애국가 울려퍼지면서 사격시작. 1시30분에 장갑차가 도청향해 질주함. 그 위에 청년한사람이 절규하다가 총맞고 죽음. 그 뒤 한국은행 광주지점앞에 청년 5-6명이 구호 외치다가 죽음. 시민들은 아세아자동차의 시위진압용 가스차까지 동원해서 싸움
다수의 청년들은 차량 나눠타고 인근 화순 나주 등으로 빠져나가 경찰서 무기고를 텀. 그 때는 경찰병력이 다 광주집중이라 인근 경찰서는 텅 비어있었음. 결국 그 무기로 시민군이 탄생함. 신군부는 시민군이 등장하자 일단 철수한뒤 주변을 봉쇄함. 그 때 광주와 다른 시 경계 부근에서 대거 양민학살이 벌어짐
당시 한국대통령이 독자적 지휘권 행사할수있는 부대는 수방사와 공수특전사뿐. 광주로 시위진압전문인 20사단을 보내려먼 한미연합사승인 필요했음. 근데 미국은 이를 승인했음.
전두환 역시 국회의원을 3분의 1은 전국구로 하고 그중절반을 1당에게 우선배정하고 나머지 득표율따라 배분 지역구는 역시 중선거구제로 여당이 무조건 당선되는 제도를 만듬. 그결과 유신시대처럼 야당이 득표율 앞서도 의석수는 여당이앞서는 기현상.
전두환과 불편한 관계던 보안사령관 강창성까지 삼청교육대상자였다.
생존자 증언: 눈 쌓인연병장에 소주병 깨서 유리조각 뿌리고 그위를 기게 만듬 그리고 참나무 굵은 걸로 꽁꽁 언 몸을 때림. 그럼 장작 빠개지듯 몸이 빠개짐. 밥알 주워먹다 맞아서 죽고, 표정 잘못지었다가 80대 맞고.. 이 삼청교육이 끝나고도 근로봉사가 이어짐. 그리고 나중에는 보호감호 조치에 처함. 1980년 사회보호법 공포에 따른 조치.
기독교방송 폐지, 신아일보는 경향신문으로 서울경제는 한국일보로 동아방송과 동양방송은 kbs로 합동통신은 연합통신으로 통합. 1도 1사정책. 보도지침 사건조차 보도하지 말라는 보도지침이 내려옴. 유비통신(유언비어)의 전성시대
82년 한해 개봉된 한국영화 56편중 65퍼센트인 35편이 에로영화.
인신매매가 이때 탄생했는데 향락산업 번창하면서 공급이 모자라 유부녀를 납치하기 시작한 것. 향락산업에 기생하는 조폭도 이때 생겨남. 이 당시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 4명 중 1명은 성매매업에 종사했을 정도..
야간통행금지 해제하고 심야다방 심야극장등 심야영업 허용. 극장들은 에로영화틀고 다방들은 포르노 비디오 틀고 그랬다.
이 당시 3s를 썼어도 전두환 정권에 대한 호감과 정치적 무관심이 증가하진 않았다.
향락산업의 경우는 경제력있는남성들만 즐길수 있는 거라서 민중들은 오히려 반감을 가짐.
스포츠는 즐기긴했어도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은 여전했다. 올림픽을 예로 들어봐도 민중은 올림픽 개최를 위해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올림픽 1년 앞둔 시점에서 민주화 투쟁했다. 결국 올림픽 자기가 개최해놓고 참석조차 못한 전두환. 민중들은 독재체제가아닌 상태에서 올림픽개최를 하기 원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경우 젊은이들은 낮에는 시위하다 밤에 심야극장에서 에로영화보는 게 흔한 일. 정권이 조장한 대중문화 즐기면서도 정권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않았다는 점.
85년 10월 서울대 복학생 우종원이 변사체로 발견됨 86년 6월에는 연안가스 노동자 신호수가 시체로 발견됨 같은 달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서울대생 김성수가 익사체로 발견됨-->학생운동 중심지는 서울대였다. 81년 서울대 중도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외치고 투신한 김태훈도 있었다. 서울대가 시위하면 인근 동양최대 파출소인 관악파출소는 물론이고 동작 영등포 구로 남부 경찰서 경찰병력 총출동 그러다보니 진압병력>시위 학생수
녹화사업: 강제징집자와 운동권 출신 입영자 대상으로 일련의 순화교육시키고 프락치 일 시키는 것.
수배에 의한 피신자를 도발이라고 부름.
학생운동 진영은 동아리활동 제약받자 학과사무실을 거점으로 이용.
학생운동도 전략적으로 함. 학내 시위가 발생해 경찰병력 총 집중하면 학교 근처 여당당사 기습타격. 여기에 더해 학내시위ㄱ와 가두시위 적절히 결합 여러장소에서 동시다발 게릴라성으로 진행. 결국 모든 주요 도심을 방어해야 하는, 물리적 방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직면함 탄압받을수록 학생운동이 성장하자 전두환정권은 방향 전환 결국 84년 학원자율화조치라는 이름아래 일련의 유화조치가 시작됨. 학내 경찰철수시키고 경찰진압자제하고 제적학생복학시킴. 학생회 부활됨.
어떤 시위 때의 이야기: 한 학과 학생들이 시내에서 전단지 나눠줌. 예상대로 경찰 투입 여학생 한명 연행하려 함. 그러자 다들 자기가 주동자라며 손에 쥔 전단을 보여줌. 다른 학과 학생까지 몰려와 이러는 바람에 연행학생 모두를 석방할수밖에없었다. 다음날 경찰압력받은 학교당국은 연행된 학부모들을 학교로 소환함. 학생들은 기다렸다는듯 학생학부모 간담회개최 결국 학부모들 의식화의 계기가 됨
84년 민주화 투쟁 학생연합결성하고 85년 전국학생총연합 발전 그 산하에 삼민투(민중 민족 민주) 설치
1984년 11월 14일 허리우드 극장 주변에 학생들이 짝지어 민정당 중앙당사 습격. 한 학생이 학우여 를 외치자 민정당당사로 300여명의 학생들 밀고 들어감. 9층 회의실에서 창문에 플래카드 걸고 농성 들어감. 당사 뺏긴 민정당 고위간부들은 나중에 혼남.
85년 5월 되자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문제로 나라가 들끓음 대학가는 각종 전시회와 토론회 언론은 특집으로 그걸 다루고 야당도 진상규명 주장함 이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미국이 자연스레 투쟁의 표적이 됨. 그해 5월 미문화원 점거농성이 일어남
민정당 당사와 미문화원 점거 모두 전학련의 작품
86년 건대사태: 그해 10월 2천여명이 '전국 반독재 반외세 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 가지고 레이건 나카소네 화형식 거행. 그 순간 학교주변 포위하던 1500여명의 경찰이 최루탄 쏘며 밀려듬. 학생들은 건물로 피신해 계획에없는 농성 실시. 경찰의 삼엄한 봉쇄조치에 맞서 지도부를 구성하고 농성건물간 연락체계 마련하고 규율만들어 철저히 준수하는 능력을 보임. 경찰의 단전 단수조치에 더한 한판 속에서도 하루 2끼, 라면하나를 6명이 나눠먹으며 나흘을 버팀. 31일 학생들에대해 진압작전 황소 31입체작전 실시. 8천여명의 경찰 동원해 하늘에서 헬기가 최루탄 쏘고 고가사다리 소방호스에서 최루액 뿜고 난리였음 1525명 학생 연행되고 그 중 1290명 구속 단일사건구속자로 세계최고수준-->전두환정권의 말기적증상
84년 5월 대구에서 1천여명 택시기사가 총파업 돌입. 학생운동은 이에 동조. 스크럼 짜고 영등포역에 모여 유인물 나눠주고 정리집회하고 해산함. 경찰이 잡지 못한 이유는 이들의 후미를 택시기사들이 엄호했기 때문. <-- 노학연대의 일종
야학은 노학연대의 공간.
청계피복노조 투쟁: 전태일의 법대생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실천투쟁으로 받아안는 일. 84년 9월 그가 분신한 자리에서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열기로 함. 강제진압되긴 했어도 이런 시위로 인해 3년만에 청계피복노조는 합법성 획득함<--노학연대
공활: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일차적으로 집중했던 건 소수의 선진노동자 발굴 육성. 그결과 다수 노동현장에서 학생운동출신자들과 선진노동자가 결합한 소모임이 만들어짐 이런 노력의 결과가 구로동맹파업
85년 6월 경찰이 대우어패럴 김준용 구속. 그러자 구로지역 민주노조가 즉각 동맹파업으로 대응. 구로공단내 9개노조가 동맹파업 돌입. 정부와 기업주가 외부에서 음식물 끊고 물 끊었고.. 결국 노동자들이 기진맥진해 관리자들에의해 구타당하면서 끌려나옴. 이 때 구로지역에 있던 학출 노동운동가 (김문수도 그 중 하나)들은 사태를 비관하기도 함.
83년 9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결성: 70년대 학생운동 주도하던 인사 주축으로 만들어진 공개단체
민청련의 전단살포방법: 가두시위 있을 때 건물옥상에서 전단 살포하는 공중전. 경찰이 곧바로 난입해 시위자가 붙잡힐 가능성이있다는게 문제. 그래서 전단살포자는 계단중간쯤가있다가 경찰 올라오는 소리들리면 방향바꿔 올라가는 척함. 경찰은 시위자를 지나쳤고 시위자는 유유히 내려옴.
민청련의 거리극: 거리나 전철에서 한 사람이 각본대로 전두환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화두를 던지면 다른 사람이 이사람과 논쟁. 그러면 사람들이 관심갖게됨.
85년 7월 미문화원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 부모들이 모여들고 이런 식으로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결성됨.
이게 더 확대돼 같은 해 12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결성됨 86년 5월에 민가협가족들은 장안동 대공분실건물내부를 습격하기도 함. 또한 이 단체는 민주화운동열기 방방곡곡확산시키는데 기여. 이들의 활동은 전두환 정권 폭압정치가 궁극적으로 자기 무덤파기에 불과함을 보여줌. 탄압 강화되고 희생자늘어날수록 민가협 힘은 커졌고 활동이 더왕성해졌기 때문.
73~87년까지 수감 가택연금 해외망명 상태에서 보낸 김대중..
김영삼은 가택연금 풀리면서 등산 시작. 매주 목요일 사람들과 산행. 여기에 민주산악회라는 이름이 붙여짐.
그가 대통령 됐을 때 '워커가 물러가니 등산화가 설친다'는 말 나옴.
85년 2.12 총선에서 대승한 신민당은 그 기세를 몰아 3월부터 개헌추진위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가짐. 각 지역 개헌현판식을 기회로 장외투쟁 시작. 그런데 5월 인천행사때 수도권 일대 운동권들이 모두 모이면서 다양한 급진적 주장들이 쏟아져 나옴. 이 사건 계기로 신민당은 장외투쟁 포기하고 제도권 내에서의 운동모색으로 방향선회
민주항쟁 당시 조사에 따르면 경제 성장 늦춰도 인권신장시켜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85.7%
전두환이 군부대투입고려했지만 민중들은 80년의 학생회 지도부와 달리 군부대투입에도 더이상물러나지 않음. 6월 18일 부산에는 계엄령설이 퍼져있었고 새벽부터 시내상공에 군용 비행기 선회중. 그러나 학생들은 휘발유통 옥상으로 옮기고 태극기 내걸었다. 군부대 투입되면 분신하겠다는 각오를 보임
전두환은 19일 군부대 투입을 결심했지만 릴리 주한미국대사는 군부대투입반대. 작전지휘권 쥐고있는 미국반대하면 답이없음. 미국이 반대한 건 무엇보다 한국군 장병들이 시위진압명령을 따를지 의문이라는 점. 5.18거치면서 군장병들의 민주의식이 높아졌기 때문
4월 혁명 주체는 5.16쿠데타 당시의 군부 총칼위협앞에서 죽음을각오하는투쟁못했다. 이걸 뛰어넘은게 광주민중항쟁. 하지만 광주민중항쟁은 지역적 고립이라는 한계. 6월민주항쟁은 광주민중항쟁정신 계승과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한 투쟁
-->4.19가 미완의 혁명이라면 87년 6월에 그게 완성됐다고도 볼수있겠다
이승만때까진 미국이 경제원조로 한국통제하고 박정희때는 원조가 줄고 군사독재가 미국의 한국정부 통제를 위한 핵심고리로 기능함. 작전지휘권 바탕으로 군부장악하고 그 군부가 담당하는 한국정부를 쉽게 통제한것 6월민중항쟁은 국가권력을 민중의 통제아래둠으로써 그 핵심고리를 끊는 계기가 됨
89년 여의도 농민시위. 2만여명의 농민이 함께함.
7.8.9 노동자 대투쟁때 8월 18일 현대그룹 노동자들 시위가 압권. 중장비로 경찰병력 다 밀어버림 노동조합은 이때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외연도 급속히 확대됨. 병원노동자 사무 전문직 노동자 전교조 과학기술노동자들 모두 이때 노조결성.
87년 여연 결성 89년 경실련 결성 94년 참여연대 결성
경실련은 지나치게 정부 친화적 관계. 95년 개각에서 경실련인사 이수성이 국무총리에 기용되자 자기들기관지에 대홍보. 결국 이들의 권위가 실추됨
민주화세력의 오산: 개헌을 소홀히 함. 결선투표도입했더라면 이후 정치판도 달라졌을 것.
백기완은 유세때 20만명 유권자 모일만큼 호응얻었지만 사표방지 압박견디다못해 중도사퇴함.
3당합당 반대하면서 합류거부한건 김정길과 노무현뿐.
94년 평시작전권 환수는 미국입장에서 한국군부가 몰락했으니 군부장악을 통해 한국정부 통제하는 게 가능하지 않았음을 의미.
그런 상태에서 평시작전권 갖고있는 건 무의미.
95년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이 구시대정치인이라는 이유로 축출. 김종필은 탈당해 자민련차림.
김대중은 세번의 대선출마 실패하고 정계은퇴이후 결론을 얻음. '보수진영과 손 안 잡고 단독집권 안 된다' '미국 지지없이 정권획득에 도전하는 건 무리다' 이 생각으로 케임브리지대학 유학 떠남. 여기서 집중적으로 대처시절 만개한 신자유주의를 공부함
그렇게 djp연합만들고 바로 직후 포철 회장출신으로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지냈던 박태준이 자민련에 입당.
2002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사태: 구조조정과정에서 노동자 해고. 해고된 노동자들은 출근투쟁에 나섰고 법원은 해고자도 노동자이므로 노조사무실 출입은 합법이라고 판결. 변호사와 노동자가 노조사무실 들어가려 하자 경찰이 막고 나섬. 변호사는 판결문 읽어주고 책임자불러달라했으나 경찰은 무시함. 노동자들은 화가나서 웃통벗고 길거리에 누웠다. 그러자 경찰이 웃옷벗고있는 노동자들 마구 폭행.
시민사회운동진영은 국보법폐지 지지하려고 2004년 12월 국민단식농성을 여의도에서 진행 규모는 1천명. 여당원내대표와 국회의장 압박하기 위해 정읍, 안산에 원정투쟁도 가고 열우당 당사앞에서 노숙투쟁도 하고 국회의장 공관앞에서 직권상정 요구하면서 연좌농성. 단식 23일째 국회진입위한 처절한 투쟁끝에 경찰에게 무참히 깨짐.
맑스: 공산당 선언에서 미래사회를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라고 함
신세대는 생활을 중시. 정치는 생활에 복속돼야 한다는 점에서 이는 올바른 방향
신세대가 다원주의적이라면 구세대는 흑백논리적
구세대가 민주주의를 수적 다수의 지배로 봤다면 신세대는 그 다수를 균질적인 다수가 아닌 개성 넘치는 다수로 봄. 말하자면 질과 내용을 중시한 것.
'나는 짐승을 죽였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김부남사건(1991) 김보은 김진관 사건(1992)
서울대 우조교 사건(1993)
이태영은 1953년 호주제 폐지법안 제출했으나 김병로대법원장에게 호통맞음.
정태춘 박은옥은 1990년, 1993년 불법음반 제작 영화 사전심의는 독립영화사 장산곶매의 '닫힌 교문을 열며'가 시초.(강헌)
조선노동당대회: 1980년 6차대회개최이래 30년 지나도록 당대회 개최 못했다-->북한의 처지가 좋지 못하다
장하준 교수가 강조했듯 기술은 본디 무역을 통한 교류에서 발전됨. 북한은 고립돼 그럴 기회 없었음. 1984년 합영법 제정 1991년 나진선봉지구를 자유무역경제지대로 지정. 2001년에는 7.1 경제개선조치 발표. -->자본주의 도입
그러나 철도 노후화등 어려움이 많다. 대부분 철도가 20키로밖에 속도 못냄.
94년 미국대사는 주한미국인을 소개할 것을 통보. cnn 은 휴전선생방송위해 mbc에 협조공문 보냄.
이때 아태재단 이사장이던 김대중이 카터 방북제의 결국 위기해결
조명록: 73년 이집트에 파견돼 이스라엘제압하던 북한공군조종사의 최고책임자 북한의 자기과시용
84년 남북 체육회담(la올림픽 단일팀 구성목적)에서 말다툼
남측: 버마테러와 최은희 신상옥 납치를 사과.
북측: 발언 취소해라
북측: 당신 남산에 있는 모양인데 남조선 인민들을 핍박한 손 씻어라...
남측이 김일성 독재 운운하자 북측이 남측에 성냥갑던지기도함
정주영은 총 1001마리 소를 보냈는데 이는 1000으로 끝나지않고 새로운 시작을 예비하자는 뜻
96년 8월 14일 범민족청년학생연합 통일대축전이 개최되고 있었는데 한총련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경찰이 중장비에 헬기까지 동원해 공격을 가함. 연행 학생수는 5848명. 규모로는 전두환때 건대사태 능가함.
83년 2월 전국에 사이렌 울림. 민방위본부에서 인천이폭격당한다고 함. 그러나 이는 오보. 북공군 이웅평대좌가 미그19기타고 북한탈출해 휴전선넘어온게 사건의 발단. 이 때 국민들은 정신없이 사재기. 그러나 서해교전때는 더이상 그런일없음. 대처가 달라짐
개성공단은 저임금노동력수탈을 기반으로운영돼선 안된다. 북한노동자들이 남한노동자에 비해 임금낮은거 아는건시간문제. 감정만 나빠짐. 남북합작공단은 한반도전체에서 생산성가장높고 가장선진적시스템갖춘 곳이 돼야 함.
-->첨단과 첨단이 만난 통일 클러스터
송나라때 국민소득 1천달러 세계적 선진국.
중국은 제국주의 경험 없다 그 이유는 밖으로 눈돌리는 순간 내부가 위험해질수있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 중국은 그자체 유지하기도 벅찰만큼 큰 나라이기때문
일본은 국제사회눈피해 핵폐기물을 영국프랑스재처리시설에 위탁해 플루토늄확보. 일본은 결국 준 핵보유국이 됨
전후 수십년동안 사회당과 공산당의 존재로 30퍼센트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하던 일본이 사회당의 몰락으로 보수정당이 독주하게 된 것도 우려할만한 일 일본 진보들은 하나같이 눈물나게 착하다. 하지만 이를 바꿔말하면 일본에서 진보적 입장견지하기 그만큼 어렵다는 것. 시민들이가까이하기에 너무 고결하고 원칙적이다.
읽은 책: 미래를 여는 한국인 경제편
240쪽 이어서.
상위권 재벌들은 원 세트 주의에 입각해 스스로 취약하다 싶은 곳에 진출, 모든 업종을 평정하려는 의욕 드러냄. 삼성그룹 자동차 뛰어들고 현대가 전자에 진출한 게 대표적 사례. 한보가 6조원 은행대출받아 대규모 철강회사를 세운것도그런맥락.
김영삼정부는 재벌의 무분별한 해외투자가 초래할결과 예상하고 사전심의제도입등으로 억제하려 했으나 세계각국의 반발 삼. 결국 해외투자에 속수무책 결국 97년 1월 한보 3월 삼미 4월 진로 5월 기아차 부도를 거쳐 대기업 연쇄부도사태 현대건설 부도 맞았고 삼성자동차 역시 부도. 대우 그룹은 그룹 자체가 해체됨
워싱턴 컨센서스가 제시한 해답: 상이한 기반 갖는 두 세력이 연합한 중도성향 정권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추진하게 함. 그렇게 해서 다수 국민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개혁의 일환으로 여기게 함. 아울러 선거 시기 잘 활용하되 외환위기와 선거시기를 일치시킨다. 이는 전 세계 개발도상국 상대로 한 프로젝트. 한국은 이 시나리오대로 갔다 미국은 외환부족때 한국을 방치했으며 대선과 외환위기가 겹쳐왔다.
한국 IMF의배경: 단기외채 비율이 높았다, 급전을 끌어 썼다는 얘기. 돌려막다가 어려워지자 일본에 지원 요청했는데 미국 클린턴대통령과 루빈 재무장관이 편지를 보내 한국에 협조융자를 해주면 안된다고 말함. 그렇게 한국은행외환창고는 바닥을 드러냄 미국이 모든 출구 봉쇄한 상태에서 한국정부가 택할수있는 건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 유예) 아니면 IMF 한국경제는 모라토리엄 선언하더라도 극복할 능력이있었다 실제로 무역흑자를 통해 적정외환 보유고를 회복하는데는 외환위기로부터 1년도 안 걸렸다. 비슷한 시기 외환위기였던 말레이시아는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은 채 자본통제 정책 채택함으로써 1년만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영삼정부는 모라토리엄 생각도 안하고 바로IMF 신청해버림. 김대중은 미 재무부 차관만나 IMF 플러스 개혁까지 약속해 지원을 받아왔다. 미국식의 주주자본주의 시스템 도입.
2차세계대전후 영광의 30년동안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 노동자고용은 제도적 보장되고 금융은 국가통제아래 놓여있었고 기업경영은 전문경영인체제 확림. 이런 조건에서 주주는 기업운영에 간여할 수 없었다. 냉전시기였으므로 무제한적 이윤추구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강했다. 그러나 80년대 영미 신자유주의는 주주들에게 자유롭게 적대적 인수합병으로 경영권 인수하고 경영권굴복할수있게 만들어줌. 경영자에 대한 스톡옵션(주식 보너스)는 주가를 올리면 본인에게 이익이돌아가게 함으로써 경영자를 단기적 주주이익의 옹호자로 만듬.
김대중 정부때 대부분 주요 은행들 지분이 국제금융자본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한미은행 외환은행 제일은행은 소유권 자체가 외국으로.. 포스코 KT, KT&G 등은 민영화되면서 외국인 지분 절반수준 넘음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텔레콤 은 주식 절반이상 외국인 투자자. 만도기계 한라공조 LG금속 역시 최대주주가 외국인<--김규항 "국산품애용이 의미가 없다"와 같은 맥락
국제금융자본은 기업 설비투장 대해 부정적 태도 취함 효과가 2~5년뒤에 나타나므로 단기이익을 잠식하기 때문. 국민경제의 장래 따위엔 무관심. 주총에 지배당하는 경영인들.
금융시장 자유화 외채도입요건완화로 국내기업들이 앞뒤안가리고 자금끌어다썼다가 심하게 과식, 결국 배탈 일으키면서 온몸뒤틀리는 구토를 하고 맘. 당시 한국경제는 정신바짝차리고 몸 추스르면 1-2년이면 회복가능한거였는데 당장을 참지 못하고 IMF병원에 가서 오장육부를 헤집는 대대적 수술을 받음. 하지만 이는 더 큰병을 유발함.
주주자본주의 작동되면서 경제성장 주도하던 기업들 투자능력이 잠식됨. 주주들이 설비투자를 가로막고 기업들은 경영권방어용으로 막대한자금을 비축해두면서 투자여력을 약화시킴
은행이 금융자본에 점령된 까닭에 필요한 곳에 자금배분하는 능력을상실함. 중소기업대출 감소로 중소기업들이 자금부족이 돼 기술개발 실패. 결국 대기업에 대한 부품공급능력 약화. 그래서 대기업은 해외공장에 의존 그래서 대기업 수출늘어도 중소기업은 도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선순화구조 파괴됨.
식당이 인구80명당 하나. 자영업이 수익낼수없는 구조. 그러나 대부분의 자영업은 무급가족노동으로 근근이 유지됨. 그리고 살인적인 노동시간으로 먹고 삼
촛불시위는 상당히 여성스러운 방향으로 진행됨. 그동안 군가같은 투쟁가요와 복창이 지배하던 시위문화 깸.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항: 정규전이 어려우므로 게릴라전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난 대안공간을 확대해가는 방법. 이를 보금자리 전략이라 한다.
시민군이 병영국가의 대안이 되듯 재벌기업의 대안은 대안기업.
대학 무한책임제: 학생들의 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야함. 이게 가능하려면 일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내야함. 대학이 대안기업 창출 기지로 기능할때 무한책임제도 시행됨.
대학이 연구소 건립하고 각종 지원기관 확보해야하며 이 모든 게 한 공간안에서 정보 기술 인프라를 공유하며 상호 긴밀하게 협력하는 한국형 클러스터 구축해야 함 이는 지역발전전략이기도 함.
이를 주도할 사람은 학생들. 이 주도자들은 노동하는 경영자이자 경영하는 노동자. 근대이후 지속된 자본과 노동의 분열을 지양하는 존재. 이게 가능할려면 역사의식, 정치적 소양등을 갖춰야 한다. 7-80년대대학이 병영국가에 맞선 기지라면 이제는 기업국가에 맞선 기지가 되어야 한다.
한국 현재 생산력 수준이면 하루 4시간 일해도 먹고 산다.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수도권 밀집을 해소하고 지방 중소도시 활성화해야한다. 여기에는 대학중심의 클러스터 형성이 핵심이다. 노인들도 이런 작은 마을에 둥지를 틀어야 함. 마을공동체의 부활
교통시스템은 장거리는 철도, 중거리는 전철 버스등의 대중교통단거리는 자전거 이용하게 하는 방향으로 가야되며 승용차는 비상용이 되어야 한다. 철도는 승용차와 비교해서 에너지효율성 8배, 이산화탄소배출 13분의 1.
애덤스미스는 상업주의 사회에서 누구든 얼마간은상인이라 했지만 앞으로 미래사회에서 우리는 얼마간은 농부다.
박태준은 전형적인 남방계 바이칼 호숫가의 브리야트 자치공화국과 우리가 비슷함.